
대한민국 방산·반도체 생태계의 새로운 전환점, 한화그룹의 용인 공장 건설이 던지는 전략적 메시지
대한민국 산업계에서 한화그룹만큼 빠른 속도로 포트폴리오 재편을 단행하며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기업집단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최근 산업계 일각에서는 한화그룹이 반도체 사업을 정리하거나 해외로 이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미중 기술패권 경쟁, 그리고 국내 제조업의 높은 인건비와 규제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우려를 증폭시켰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화그룹이 용인에 대규모 반도체 관련 공장을 신축한다는 소식은 단순한 ‘이전설 불식’을 넘어, 대한민국 첨단산업 생태계에 대한 장기적 신뢰와 투자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번 용인 공장 건설 결정은 여러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한화그룹은 방위산업과 항공우주, 에너지 솔루션에 이르기까지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모든 분야에서 반도체는 핵심 부품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방산 분야에서는 고신뢰성 반도체가 필수적이며,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자체 생산 능력 확보가 절대적입니다. 둘째, 용인은 수도권 내에서도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와 인접한 반도체 클러스터의 중심지로, 숙련된 인력 풀과 협력업체 네트워크를 활용하기에 최적의 입지입니다. 셋째, 정부가 추진 중인 ‘K-반도체 벨트’ 전략과도 맞물려 있어,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 타이밍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번 결정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여전히 반도체 생산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CHIPS Act, 유럽의 European Chips Act 등 각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유도하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실제로 첨단 공정과 대량 생산 능력을 갖춘 곳은 여전히 한국과 대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화그룹의 용인 투자는 이러한 구조적 우위가 단기간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한화그룹의 용인 공장 건설 결정이 갖는 다층적 의미를 산업사적 맥락, 글로벌 경쟁 구도, 거시경제적 파급효과, 그리고 미래 투자 포인트 등 여러 각도에서 심층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단순히 한 기업의 투자 결정을 넘어, 대한민국 제조업의 미래와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적 방향성을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한화그룹의 반도체 사업 연혁과 전략적 포지셔닝: 방산과 민수의 교차점
한화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만큼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특수 목적 반도체 시장에서는 오랜 역사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화시스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중심으로 방위산업에 필요한 고신뢰성 반도체, 항공우주용 방사선 내성 반도체, 그리고 최근에는 전력반도체(파워반도체)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히 방산 분야에서는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에, 한화그룹의 반도체 자체 생산 능력은 단순한 상업적 가치를 넘어 전략적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은 메모리 반도체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며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은 메모리에서 비메모리, 특히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5G/6G 통신, 사물인터넷(IoT) 등 새로운 기술 트렌드가 부상하면서 맞춤형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화그룹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범용 메모리보다는 특수 목적 반도체와 파워반도체에 집중함으로써 차별화된 경쟁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파워반도체는 전력 변환과 제어를 담당하는 핵심 부품으로, 전기차, 태양광 인버터, 산업용 로봇, 데이터센터 전원공급장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입니다. 글로벌 파워반도체 시장은 2023년 약 200억 달러 규모에서 2030년에는 4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며, 연평균 10% 이상의 고성장이 예상됩니다. 특히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파워반도체 수요를 견인하는 핵심 동력입니다. 한 대의 전기차에는 약 300~500달러 규모의 파워반도체가 탑재되며, 이는 내연기관차 대비 10배 이상 많은 수치입니다. 한화그룹은 방산과 항공우주에서 축적한 고신뢰성 반도체 기술을 바탕으로 파워반도체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화그룹은 최근 인수합병을 통해 반도체 밸류체인을 수직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도체 소재, 장비, 패키징 등 전후방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단순 제조를 넘어 종합 솔루션 제공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는 삼성전자나 TSMC처럼 거대 파운드리 기업이 되기보다는, 틈새시장에서 높은 마진과 안정적 수익을 창출하는 전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용인 공장 건설은 단순한 생산능력 확대가 아니라, 한화그룹의 반도체 사업 전반을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한 핵심 인프라 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화그룹이 방산 부문에서 글로벌 Top 10 수준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K-9 자주포, 천궁 방공미사일, 차세대 전투기 사업 등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폴란드, 호주, 중동 등 해외 수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방산 시스템의 디지털화, 네트워크화가 가속화되면서 고성능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자체 생산기지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용인 공장은 단순히 상업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방산용 특수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큽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한국의 전략적 위치: 미중 패권 경쟁의 최전선
현재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역사상 가장 격렬한 재편기를 겪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반도체는 단순한 상업 제품을 넘어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부상했습니다. 미국은 2022년 CHIPS and Science Act를 통해 향후 10년간 약 2,800억 달러를 반도체 산업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중 520억 달러는 직접 보조금과 세액공제로 배정되었습니다. 인텔, TSMC,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들은 미국 내 대규모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발표했으며, 이는 지난 30년간 아시아로 집중되었던 반도체 생산기지를 다시 분산시키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됩니다.
중국 역시 반도체 자급률 제고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2015년 발표된 ‘중국제조 2025’ 계획에서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비록 미국의 강력한 수출 통제로 인해 목표 달성이 지연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수천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하고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 등 자국 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숙 공정(28nm 이상)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첨단 공정(7nm 이하)에서도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