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 인프라에서 승부가 갈린다
2025년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 안보와 경제 주권이 걸린 총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CHIPS법, 유럽의 반도체법,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정책이 충돌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생산 인프라의 혁신, 특히 전력 공급의 안정성과 효율성이 반도체 제조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과정에서 도로 밑에 전력망을 구축하기로 한 결정은 언뜻 보면 단순한 건설 공법의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반도체 산업의 본질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전략적 선택입니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중소도시 하나가 사용하는 수준에 달하며, 특히 차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과 DDR5, LPDDR5X 등 고성능 메모리 제조 공정은 극도로 정밀한 전압 제어를 요구합니다. 0.001초의 전력 불안정도 수억 원 상당의 웨이퍼를 불량품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전력 인프라의 설계는 곧 경쟁력의 설계인 것입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단순한 공장 단지가 아닙니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와의 메모리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나아가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과의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설계한 전략적 거점입니다. 총 120조 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프로젝트는 2027년부터 본격 가동될 예정이며, 완성 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반도체 생산 클러스터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메가 프로젝트에서 전력망을 지하화한다는 결정은 단순히 공간 효율성을 넘어, 재난 대비, 유지보수 효율성, 미래 확장성까지 고려한 종합적인 전략적 판단의 결과물입니다.
20년간 반도체 산업을 지켜본 전문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결정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완전히 전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따라가며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설계하고,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는 인프라 투자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술적 자신감뿐 아니라, 장기적 비전과 실행력을 갖춘 조직 역량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반도체 제조의 숨은 영웅, 전력 인프라의 진화
반도체 제조 공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에너지 집약적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최신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한 대가 소비하는 전력은 시간당 1메가와트 수준으로, 이는 일반 가정 약 1,000가구가 동시에 사용하는 전력량과 맞먹습니다. SK하이닉스가 용인에 건설 중인 4개의 팹(fabrication facility, 반도체 제조 공장)은 각각 월 10만 장 이상의 300mm 웨이퍼를 생산할 계획인데, 이를 위해서는 연간 수십억 kWh의 전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울산광역시 전체 연간 전력 소비량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입니다.
전력 수요의 절대량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력 품질’입니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나노미터(nm) 단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극도로 안정적인 전압과 주파수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SK하이닉스가 주력하고 있는 HBM3E와 차세대 HBM4는 수직으로 12층 이상의 D램 칩을 쌓아 올리는 3D 적층 기술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전압 변동은 칩 간 연결 불량으로 이어져 수율(양품률)을 급격히 떨어뜨립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HBM 제조에서 1% 수율 차이는 연간 수천억 원의 수익 차이로 연결됩니다.
지하 전력망 구축은 바로 이러한 전력 품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전략입니다. 지상의 전선은 기상 조건, 외부 충격, 온도 변화 등에 취약하며, 특히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태풍과 폭설이 발생하는 지역에서는 전력 공급의 안정성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반면 지하 전력망은 외부 환경 변화로부터 차폐되어 있어 훨씬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합니다. 또한 도로 밑에 설치함으로써 유지보수 접근성을 확보하면서도 클러스터 내부 공간을 최대한 생산 시설에 할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계 철학은 대만 TSMC의 난커(南科) 사이언스 파크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TSMC는 2000년대 중반부터 주요 팹 단지에 지하 유틸리티 터널 시스템을 구축해왔으며, 이를 통해 전력, 용수, 가스, 화학물질 공급 라인을 통합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 덕분에 TSMC는 2022년 대만을 강타한 대규모 정전 사태에서도 주요 생산 라인의 가동을 중단 없이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SK하이닉스의 이번 결정은 이러한 글로벌 베스트 프랙티스를 한국 실정에 맞게 진화시킨 것으로 평가됩니다.
더 나아가 지하 전력망은 미래 확장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2~3년 주기로 새로운 세대의 공정 기술이 등장하며, 각 세대마다 전력 수요 패턴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차세대 GAA(Gate-All-Around) 트랜지스터 기술이나 3D NAND의 300단 이상 적층 기술이 상용화되면, 현재와는 전혀 다른 전력 공급 방식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지하에 여유 공간을 확보해둔 전력망 구조는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는 30년 이상 사용될 산업 인프라를 설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입니다.
전력망 지하화는 또한 환경 및 안전 규제 강화라는 글로벌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2023년부터 대규모 산업 시설에 대해 전자기파(EMF) 노출 기준을 대폭 강화했으며, 미국 환경보호청(EPA)도 반도체 공장 주변 지역사회의 환경 영향 평가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지하 전력망은 전자기파 차폐 효과가 뛰어나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이는 향후 국제 시장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2030년까지 RE100(재생에너지 100%) 달성을 선언한 바 있으며, 용인 클러스터는 이러한 지속가능성 전략의 실험장이 될 전망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패권 경쟁, 인프라가 판도를 바꾼다
현재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가 과점하는 구조입니다. 2024년 기준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약 42%, SK하이닉스가 29%, 마이크론이 23%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NAND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33%, 키옥시아 19%, SK하이닉스 18% 순입니다. 이러한 과점 구조 속에서 미세한 기술적 우위나 생산성 차이가 시장 지배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AI 시대를 맞아 HBM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이 분야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24년 엔비디아의 H100, H200 GPU에 독점 공급되는 HBM3, HBM3E를 생산하며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확보했고, 2025년에는 HBM3E 12단 제품과 차세대 HBM4 개발을 완료할 계획입니다. 이 과정에서 용인 클러스터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기존 이천 공장과 청주 공장은 D램과 NAND 생산에 특화되어 있는 반면, 용인 클러스터는 처음부터 AI 메모리와 차세대 고성능 메모리에 최적화된 설계로 건설되고 있습니다.